뇌종양을 앓고 있는 네 살 나오미는 소아신경외과 의사인 프레드 엡스타인에게
‘내가 다섯 살이 되면 두 발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배울 거예요’라고 소원을 말했다.
나오미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는 혼수 상태였다.
어려운 1차 수술 후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도 저자가 회진을 할 때마다 나오미는
다섯 살이 되면 하고 싶은 새로운 계획들을 들려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오미는
자기가 다섯 살까지 살 수 있는 지는 묻지 않았다.
프롤로그에는 프레드 엡스타인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적혀있다. 그는
자전거를 타다가 웅덩이에 빠져 뇌를 크게 다치고 26일간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2년간의 힘든 재활훈련을 거쳐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즈음,
소아신경외과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던 저자가 돌봤던 어린 천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오미의 소원은 엡스타인 박사의 책 제목이 되었다.
내가 읽은 책, <내가 다섯 살이 되면>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린이가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적을 일구어 내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치료 후 변화된 아이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
우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을 아이들이 어떻게 이겨 내는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저자는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현실에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의 마음은 열려있어서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도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놀라운 회복력과 강인한 재생력을 보여준다.
저자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힘겨운 상황에도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 순간에도 우리 병원에는 아이들이 뛰노는 활기, 웃음과 기쁨이 가득합니다.
어느 순간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삶은 축복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나는 최근에 <여행자>라는 영화를 보았다. ‘우니 르콩트’ 라는 한국계 프랑스
감독의 자전적 영화다. 아홉 살 진희는 ‘곧 데리러 오겠다’는 아빠의 약속을 믿었다. 처음에는 낯선 보육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말썽을 부렸지만 차츰 기세가 꺾였다. 나는 진희가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진희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누웠다. 무심한 표정으로
구덩이 주변의 낙엽과 흙들을 긁어모아 온 몸을, 나중에는 입, 코, 눈까지 덮는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진희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프랑스행 비행기를 탔다.
어린이가 강한 또 하나의 이유는 상상력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어린 환자에게 상상력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어준다. 척수종양수술을 받기 전날 두려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매튜는 병원 가는 길에 가장무도회 가게에 들러 배트맨 의상을 구입하였다. 매튜는 주차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수술실로 당당하게 향했다. 망토를 걸친 순간, 자신은 무적의 배트맨이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스스로 상상력을 억누르는 어른은 딱한 존재다. 희망과 상상력을
묻어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른이 쉽게 택하는 길은 ‘자살’이다.
완치된 이후 어린 천사들은 또래 아이들 보다 훨씬 정신적으로 성숙해져서
자신의 투병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고통 받는 다른 영혼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고 한다. 끝내는 기적을 만들지 못하고 가슴에 자식을 묻어야 했던
부모는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재단을 만들어 아이들의 짧은 삶이 헛되지
않도록 한다.
저자는 평소 우리가 지나쳐 왔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하나 짚어주었다. 바로
환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가족 중 한 명이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되면 환자중심
으로 생활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린다. 의사는 환자의 암세포
자체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암세포와 함께 생존하고 있는 ‘환자’와 그의
‘가족’과의 정서적인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엡스타인 박사는
주장한다.
저자가 뇌를 다치고 의식불명상태에서 회복되어 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린 환자들로부터 배운 게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과 상상력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두려움이 생각을 지배하고 내가 만든 사고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이 책을 통해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 우리집 아이들이 나로부터 배우는 것 보다는
내가 아이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다.
첫 문장에 등장하는 나오미는, 마침내 다섯 살이 되었고, 종양으로 인해 뇌에
약간의 손상을 입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오미는 이제 서른 살이 되었고 식료품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안녕,
프레디 Dear Freddy Boy'라고 시작하는 즐거운 소식이 담긴 편지를 보내온다고
한다.
- 2010.1.19(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