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知

정체성

필85 2018. 2. 11. 22:43

사건의 발단은 샹탈이 몇 살 아래 동거인인 장 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느날 샹탈은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 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라는 문장이 쓰여진 익명의 편지를 우체함에서 발견하지만 연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편지를 속옷 아래에 숨긴다.

장 마르크가 '그냥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남자들이 더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그녀를 당장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서 시작한 시라노(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연정을 고백한 남자) 연기였지만 상황은 엉뚱하게 돌아간다.

이어지는 편지는 샹탈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고 샹탈은 그대로 따르면서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웃 중에 누가 스파이인지 찾아나서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장 마르크는 평소와는 다른 샹탈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다. 어느날 그는 샹탈에게 '당신은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측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샹탈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는
마찬가지다. 이야기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다.

밀란 쿤데라는 이 책에서 정체성에 대해 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힌트는 준다. 그는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될거라고 말한다. 과거의 사건과 그것으로부터의 기억은 정체성의 단서가 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변할 수 있는 것인지, 정체성은 나와 타자 중 누구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인지 등등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화두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통해 쉽게 풀어가는 밀란 쿤데라의 문학적
천재성에 감탄하게 된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소설은 잠시 잊고 지냈던 나의 정체성, 내가 사는 도시의 정체성,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일깨워 준다. 시라노 영화처럼, 농담처럼 가볍게 읽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