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知

나를 뺀 세상의 전부_김소연_190512

필85 2019. 5. 12. 23:00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것을 믿어 보기로 했다."('책머리에' 중에서)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일, 예를 들면 친구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고, 엄마와 김장을 하고, 여행지에서 낯선 이와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생각난 것들을 가볍게 원고지에 옮겨 놓았다. 주변의 일들에 대해 지식인인 척 잘난체 하지 않고 쓴 글이라서 일상을 사는 독자들은 쉽게 고개가 끄떡여진다. 우리가 밥먹듯 마주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시인의 눈에 잡힌 일상은 나의 독서노트에 옮겨 적을 만한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충고는 모험을 가로막고 안이한 선택을 강요하는 경향을 띤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어법에 대한 고민을 좀처럼 안하는 걸로 보인다. 말투가 거슬려서 거부감부터 든다."

"언제나 불의는 홀로 완성되지 않았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에게 새로운 생각을 발전시키게 하거나 커다란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내게 더 없이 소중하다. 내가 접촉하는, 크게 기대할 것 없는 나의 하루하루가 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이 책은 그 지루함의 경이로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재미 없는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