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새해 첫날 무슨 책을 읽을까? 나는 책장 앞을 기웃거리다 제자리에 꽂히지 못하고 다른 책들 위에 놓여져 있는 책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으로 시작되는 <죄와 벌>은 가난 때문에 법대를 휴학한 로쟈가 베쩨부르그의 한 노파를 살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로쟈는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전당포 주인인 노파가 <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돈을 훔치려고 했다.
로쟈는 나름대로 주도면밀하게 범죄를 준비했지만, 도끼로 노파를 살해한 순간 집에 돌아와 마주치게 된 그녀의 여동생마저 죽인다. 같은 시각에 전당포를 방문한 일행이 있었으나 운 좋게 그는 건물을 빠져나오고 훔친 물건은 공터의 돌 밑에 숨겼다.
평소에도 병약했던 로쟈는 비록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저지른 행동이긴 하지만 살인의 충격으로 심하게 앓는다. 이 때 시골에 살고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 두냐가 베쩨부르그에 도착한다. 두냐는 가난한 가족과 오빠의 장래를 위하여 재산이 많은 루쥔과 결혼할 참이었다.
살인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던 로쟈는 우연히 전직 관료였던 술주정뱅이의 장례를 도와주면서 그의 딸, 소냐와 마음을 통하게 되었다. 그는 소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마침내 자수를 하게 된다.
에필로그에서 로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로쟈는 살인 전의 선행과 훔친 금품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묻어 둔 점, 자수를 한 사실이 참작되어 8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향한다. 소냐가 그를 따라 나섰다. 로쟈는 처음 1년간은 참회를 하기 보다는 반항하는 태도로 감옥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소냐의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게 된다.
<죄와 벌>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1, 2권을 합쳐 9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내용의 분량은 많다. 그럼에도 내가 책을 숨 가쁘게 읽어 내려간 것은 주인공의 역동적인 심리 변화 때문이다. 로쟈는 범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당당하다가 어느 순간 두려움에 떨고 다시 예비판사인 뻬드로비치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범행은 책의 앞부분에 일찌감치 묘사되었다. 로쟈의 선택만이 남았다. 작가는 로쟈의 자수, 자살, 해외로의 도피 또는 뻬드로비치가 그를 체포할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범죄 심리소설처럼 빠르게 글을 전개해 나간다.
로쟈가 어떤 선택을 할 지,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타당성을 작가가 어떻게 설명할 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책을 집에 놓고 다닐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같은 작가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비교하면 몇 배 재미있는 작품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흥미를 가질 만한 인물이 둘 있다. 한 사람은 술주정뱅이 딸인 소냐이다. 소냐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판 적이 있었지만 헌신과 사랑으로 로쟈를 변화시키는 천사와 같은 인물이다.
이에 반해 이바노비치는 료쟈의 악마적 심성이 반영된 인물이다. 이바노비치는 로쟈의 여동생인 두냐가 한 때 가정교사로 있었던 집의 주인으로 그녀를 유혹하다가 망신을 당했다. 이바노비치는 그의 아내가 죽자마자 베쩨부르그로 달려와서 다시 두냐에 대한 흑심을 드러냈다. 쾌락적 삶을 추구하는 이바노비치는 우연히 로쟈의 살인사실을 알고 그에게 달콤한 거래를 제안한다.
이바노비치가 나의 흥미를 끄는 이유는 그가 로쟈에게 제시한 거래를 거절당하자 자살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이 로쟈의 양심과 도덕률에 정면으로 부딪혔던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최근에 본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러셀 크로우 역)이 깊은 고뇌 속에서 자살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자베르 경감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범죄자라고 믿었던 장발장(휴 잭맨 역)이 선행을 하고 그를 붙잡기 위해서 추격하던 자신의 목숨까지 살려두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졌던 것이다. 평생을 지녀온 자신의 철학이 꺾이는 지점에서 그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나는 <죄와 벌>을 읽고나서 세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신념’, ‘죄’, 그리고 ‘사랑’이다. 로쟈는 그의 신념이 이끄는 대로 당당하게 행동했다. 처음에는 무자비한 살인을 했고 나중에는 깊은 후회를 하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했다. 이바노비치는 그의 신념이 무너진 상황에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의 의미 있는 순간은 평생을 가꾸어왔던 신념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시점이다.
다음은 ‘죄’에 대한 생각이다. 로쟈는 그가 행한 살인을 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양심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인 법률 보다 더 상위의 도덕률인 것이다. 시대와 공간이 달라지면 범죄의 구성요건도 달라지는 것을 볼 때 그의 생각과 논리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죄가 무엇인지, 양심과 법률이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해 도스또예프스키의 논리를 따라 잠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은 ‘사랑’이라는 단어이다. 두냐는 사랑하는 오빠의 미래를 위하여 도움이 될 만한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다. 소냐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팔았고 로쟈를 위해 시베리아까지 따라가서 옥바라지를 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그 동안 로쟈는 변해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희생이다.
우연히 블로거를 보다가 새해 시작과 함께 <죄와 벌>을 의미 있게 읽었다는 네티즌의 글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새해 첫날에 너무 무거운 책을 잡았다는 생각도 있지만 이 책이 우리 인생의 무게만큼은 무겁지 않을 것이다. 연초에 잡은 무거운 책들이 나의 삶을 가볍고 유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 2013.1.29.(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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