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원에 있으면 서러울 때 많지만 제일 서러운 것은 밤에 잠 잘 때 불빛 볼 때였어요. 2층 침대라 저녁때면 바깥 야경이 다 보이잖아요"
본격적으로 시민들을 납치하기 시작한 1975년부터 원생이 전원 퇴소한 1987년까지, 우리는 부산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시설주변에 불을 밝혀두고 그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로운 삶을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다. 국가는 보조금을 주고 어떤 이는 시설을 둘러보기도, 또 다른 이는 형제원 마당에서 개최된 행사에 버젓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형제복지원'(책을 읽고 보니, '형제' 또는 '복지'이라는 단어가 시설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은 맞지 않은 듯 하여 '수용소'라고 임의로 부르기로 한다.)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구술 기록집, <숫자가 된 사람들>에는 11명의 생존자가 수용소생활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담당하게 들려준다. '잃어버린 13년,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예요' '가난하고 힘없고 누추한 사람들은 다 제거 대상이었는가' '내인생의 비어버린 시간들, 형제복지원' '묻어놓고 살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살아요'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읽어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책장을 넘겨야 하는 이유를 인권기록 활동가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한 현재의 고통이며, 그 때문에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최소한 경청의 책임만큼은 주어져야 하는 것이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기본 틀일 것이다. 분명한 책임의식을 가진 경청은 우리가 쉽게 체념하고 외면해버린 무수한 목소리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직무유기에 눈을 뜨게 할 것이다."
또 다른 책, <살아남은 아이>의 화자는 한종선씨다. 9살 종선이는 누나와 함께 파출소에 맡겨진 뒤 수용소에 끌려가서 온갖 폭행에 시달리게 되고, 이어서 아버지마저 부랑인으로 잡혀온다. 1987년 수용소에서 퇴소할 때 누나와 아버지는 정신이상자가 되어 있었고 그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몸과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희망한다. 누나, 아버지와 산골짜기 농가 하나를 얻어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을. 가난해도 좋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는가?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다. 이 책을 읽는 당신들에게"
이 책의 후반부는 국회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한종선씨에게 기록하기를 권한 전규찬 교수가 수용소 사건을 이론적으로 해석해준다. 그는 수용소 사건이 어떻게 순식간에 잊혀졌는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 가에 대하여 차분하게 짚어준다. 전규찬 교수는 '폭력은 복지원 안에 명백하게 실재했고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실행된다. 하지만 최종책임은 여전히 추상화된다'고 하면서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상부지시를 따랐을 따름이다'라고 변명하고 있다고 한다.
명령을 내린 자(원장), 그것을 따른 자(중대장, 소대장, 조장), 시스템으로 지원 한 자(국가, 국가는 부랑인 신고, 단속, 수용보호와 관련된 내부무 훈령 410호를 발령하였으며 수용소에 운영비를 지원하였다.), 입소를 강제한 자(공무원, 통반장 등)에게 책임은 분산되었지만 수용소에는 몇 천 명의 민간인이 있었고, 그 중 몇 백 명은 살아서 문을 나서지 못했다. 끔찍한 것은 오늘까지 이 사건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보상받지도, 위로 받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가 악인들을 징벌하지 않고 또 그들을 비난 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비겁한 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또 이것은 새로운 세대들로부터 정의의 온갖 원칙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중략) 젊은이들은 비겁한 행동이 한번도 이땅에서 처벌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은 언제나 행복을 안겨준다는 것을 자기들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나라에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쾌하고 또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경청해야 한다. 읽어내기 힘든 책이라도 페이지를 넘겨야한다. 그 다음에는 국가와 개인으로 분산된 책임을 묶어서 잘못을 따져야 한다. 끝으로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줘야한다.
올 봄에는 수용소와 관련된 특별법이 통과되기를 바란다. 한종선씨가 산골짜기에 농가 하나 마련하여 누나와 아버지를 모시고 나머지 삶을 이어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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