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쓴 글

감기

필85 2012. 1. 18. 18:51

 

감기를 한 번 앓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1.11일, 수요일, 서울 출장 가는 길이었다. KTX 열차안에서 한 번 씩 터져 나오는 감기의 강도가 심해졌다. 전화통화를 위해 입을 열면 더욱 심했다. 목을 파고드는 기침이었다. 찬 공기를 맞지 않으려고 마스크를 착용하였다. 서대문에 있는 경찰청 부근 법무법인에서 개최된 회의는 다행히 두 시간을 넘기지 않았고 부산에 8시 넘어서 도착했다. 바로 저녁을 챙겨먹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지옥 같은 늪에 빠졌다.


나의 기억으로는 지난 3년간 나는 감기를 앓지 않았다. 수영이 면역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체력이 뒤받쳐 주고 있다고 믿었었다. 이번에 그 믿음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사실은 최근 체력이 고갈되었다고 할만 했다. 지난주 금요일 사무실 이사로 하루 종일 짐을 옮기는 육체노동을 하였으며, 일요일은 북극곰 수영대회 후 동아리 사무실의 이사를 도왔다. 월요일 출근하여 다시 사무실 이삿짐 정리를 하였고 그날은 저녁 회식이 있었다. 그리고 수요일 차가운 날씨에 서울출장, 내가 생각해도 병이 날만 했다.


1.12일, 목요일, 병가를 내고 하루 종일 뻗었다. 약국에서 파는 약을 먹긴 했지만, 목 깊숙한 곳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기침과 온몸으로 번진 열기,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내내 나를 괴롭혔다. 열이 나서 이불을 걷었다가 오한으로 두 겹으로 두꺼운 이불을 덮는 짓을 반복했다.


나의 머리위에 누군가 육중한 돌덩이를 그대로 올려놓은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뇌의 어디에 금이 간 것인지 정확하게 짚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틈새로 사무실의 풀리지 않은 일들과 앞으로 있을 행사들이 꼬리를 물고 괴롭혔다.


‘지옥에 가면 이럴까?’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걸 보면 분명히 뇌에 무슨 손상이 있는 게 틀림없어? 치매가 빨리 오겠는 걸’

나만 빠진 다른 가족은 신년음악회에 간 저녁, 나의 뇌는 별 시시한 생각으로 사고기능을 점령당했고 몸은 여름날 마루위의 바짝 마른 걸레처럼 내 팽개쳐졌다.


금요일 새벽까지만 해도 오늘 아침까지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두려움이 컸다. 다행히 해가 떴을 때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글로벌 교육을 위한 입학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걱정과 달리 토익 브릿지 시험도 몇 문제를 제외하고 어려움 없이 시간 안에 풀 수 있었고 논술 문제는 예상 된 질문이 나왔다. 영어 인터뷰도 점수를 후하게 주는 분위기여서 시험탈락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정도였다.


만약 내가 금요일 열이 펄펄 나고 자리에 누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거나 시험일이 목요일이었다면 나는 직장생활에 오직 한번 주어지는 글로벌 교육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각본대로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아침에 정신이 든 것은 신기한 일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어제 오후에는 가족과 볼링장(나는 구경만)에도 다녀오고 영화(‘미션 임파서블4‘)도 보았다. 내일 출근하면 아침부터 챙겨야 할 일이 산더미이겠지만 겁나지는 않다. 다행스럽게도 뇌손상은 없는 것 같고 2월 중순에 나는 글로벌 교육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에 한 번 다녀와 봐야 삶의 소중함을 안다. 즐겨 다녀올 곳은 아니다.


- 2012.1.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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