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자마자 세 편의 그림이 독자를 맞이한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1>,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 김영하 작가는 이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 처럼 보인다.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C는 총알택시 운전자인 K의 형이다. 유디트는 K의 애인이었으나 C와도 관계를 맺는다. 미미는 비디오아티스트인 C의 행위예술 모델이다. 유디트는 수면제 복용 후 가스를 틀어놓고, 미미는 욕조에서 동맥을 절단하여 자살한다. 소설속 화자는 유디트와 미미를 우연히 만나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편안한 휴식을 권한다. 나중에는 자살 도우미 역할을 한다. 이 글은 그녀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화자가 받아 쓴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러운 집으로 달려간다면 그것은 죄일까?'"(16쪽)
자살은 범죄인가? 인간은 자기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사회에 만연된 자살현상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자신에 대하여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는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재가 되면 그뿐이다.
다음은 마지막 페이지의 일부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의 한 번 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 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는냐고. 그때 내손을 잡고 따라오라"
문학적 질문에 정색하고 답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나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강요된 선택일 뿐이다. 자살권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달려왔지만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고, 진정한 휴식은 죽음이 아니라고, 한 번 더 용기를 내어보라고 내안의 또다른 나를 설득하기가 쉽지않다. 자살을 권하는 병든 사회는 하루빨리 치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