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知

소설 알렉산드리아

필85 2018. 3. 25. 23:40
"지금의 나는 너와 더불어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환각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진짜의 너는 나와 더불어 알렉산드리아에 있고 여기서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나는 나의 그림자, 나의 분신에 불과하다는 환각을 키우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우, 웃지마라. 고독한 황제는 환각없이 살아갈 수 없다."(11쪽)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 중인 형의 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지중해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로 향한다. 그곳에서 '프린스 김'이라는 이름으로 카바레에서 피리를 연주하던 중, 게르니카에서 독일군의 공습으로 가족을 읽고 독일에 복수를 꿈꾸는 무희 사라와 유태인을 숨겼다는 이유로 게쉬타포에게 끌려가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동생의 한을 갚으려는 독일인 한스를 만난다. 한스는 당시의 나찌 전범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숨어 지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찾아 다닌다.

이 책은 사라와 한스의 만남과 그들의 복수가 줄거리를 이루지만 내가 관심있게 읽은 것은 프린스 김의 형이 옥중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무엇이든 타면 재가 남는다. 모두들 재가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끝장이라고 생각한 재에서 만든 잿물로써 인간이 입는 옷의 때, 아니 인간의 때를 씻는 것이다. 어떻든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사상엔 구원이 있다."(10쪽)

"지혜라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라고 본다. 동물적인 자기, 육체적인 자기를 인도하고, 통제하고, 나쁜 짓을 했을 때는 책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무 격려하는 정신적인 자기를 가진다는 것. 어떠한 고난에 빠져있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위신을 지켜 나가려는 마음의 이법理法이 곧 지혜가 아닐까"(46쪽)

스스로 감옥에 유폐된 황제라고 생각하는 형은 철학자의 말과 자신이 만든 생각을 섞어서 담당하게 동생에게 전한다. 옥중편지는 이병주 선생의 경험이 반영된 글이다. 선생은 1961년 5월,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다.'라는 논설을 쓴 이유로 2년 7개월을 복역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시작으로 작가는 1992년 타계할 때까지 80여권의 작품을 남겼다.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등 그 제목만 들어도 격변의 시간들을 얼마나 냉엄하게 관찰하고 기록하였는지 알 수 있다.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소설의 마지막 글이다.
"나의 불면의 눈꺼풀은 무겁다. 그러나 나는 중얼거려본다. '스스로의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파멸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 형이 즐겨 쓰는 니체의 말이다. 그러나 이 비장한 말도 휘발유가 모자란 라이터가 겨우 불꽃을 튀겼다가 담배를 갖다 대기전에 꺼져버리듯 나의 가슴에 공동의 허전한 메아리만 남겨놓고 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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