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知

태연한 인생_은희경_190609

필85 2019. 6. 9. 23:55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기에는 그들은 서사가 부족했다."
"대화로 풀자는 건 자기 말을 잘 들어보라는 뜻이거든"
"남이 볼 때는 일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각자 자기 방식대로 그때 그때 이유가 있는 거야. 설명하기 어려울 뿐이지. 그게 일관성이야"
"살아있기만 하다면 누구라도 죽을 수 있다."
은희경 작가의 현란한 드리블과 페인트 모션이 잘 드러난 문장이다. 한번 만 읽고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글이라서 독서 노트에 옮겼다.

  창비에서 출간한 <태연한 인생>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요셉'과 '류'이다. 요셉은 한때는 잘 나갔지만 지금은 주춤한 소설가이다. 아내와 별거 중이지만, 잠시 교수직을 할 때는 제자 애인이 있었고 지금은 돈많은 여자가 있다. 류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눌러 앉아서 지금은 문화원에서 일을 하고 있다. 요셉과 류는 10년전 S시에서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사랑한 사이다.

한편, 소설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요셉의 제자였던 '이안'이라는 신예 영화감독이다. <위기의 작가들>이라는 영화에 요셉을 출연시키려고 섭외 중이며 류가 팀장으로 근무하는 문화원에서 제작비를 지원받게 될 예정이다. 이안은 선생자격을 갖추지 못한 요셉에게 복수를 할 계획이다. 이안은 요셉이 류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 책은 영화 <경주>(2014)와 <북촌방향>(2011)을 떠올리게 한다. 큰 사건이 소설을 이끈다기 보다는 술자리에서 삶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약간의 소동을 곁들여 가며 결론없이 주절대는 것이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이야기를 이끄는 작가나 감독의 역량이 뛰어나지 못하면 독자나 관객은 쉽게 책을 덮거나 객석을 떠난다.

<태연한 인생>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시종마(암말에게 미리 작업을 거는 대리말)이야기 같은 액자소설, 영화시나리오 삽입, 집중력을 잃지않게 하는 장면 전환, 다양한 인용문에서 은희경 작가의 내공이 돋보인다.

  다음은 요셉의 말을 옮긴 것이다.
"환상이 있었지. '더러운 역사를 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게 바로 우리라는 아름다운 환상' 따위.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당시의 시간에 복무했을 뿐이야. 지나가는 자가 되라. (중략) 그냥 그렇게 흘러가면서 떠돌면 돼. 인생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230쪽)

아래 글은 작가가 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서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265쪽)

은희경 작가는 요셉은 '어둠속에서 노래할 수 없었다.'(256쪽)고 선을 긋지만 류는 그렇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실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지만 존중과 연민, 연대속에서 흐르는 삶이라면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고 하니 흉내라도 내 볼 수 밖에.

부족한 서사를 채우고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 소설을 읽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