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은 자신이 멸망해 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라는 한 피조물이 이처럼 잔혹한 시련 속에 놓였던 일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 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 헤아려보게 된다."
'버지니아호'의 유일한 생존자인 로빈슨이 정신을 차린 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섬이었다. 그는 이곳을 '탄식의 섬'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그가 혼신을 들여 만든 '탈출호'를 바다에 띄우지 못하고 절망한 후, 섬에 적응하면서 질서를 부여한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원형을 따르는 듯 하면서 변형시켰다. 이 책의 로빈슨은 자기가 머무르는 섬을 희망의 섬, '스페란차'라고 고쳐 부르면서 인격을 부여하고 사랑하는 차원으로까지 관계를 발전시켰다.
후반부는 원주민의 제사의식에서 제물로 희생될 뻔한 흑인과의 만남과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로빈슨은 그를 '방드르디'(금요일)라 부르기로 하고 '반쯤은 생명이 있고 반쯤은 추상적인 이름으로, 시간적이고 우연적이며 마치 일화적인 것 같은 성격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라고 한다.
둘은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주인과 노인의 관계에서 동반자 관계로, 서로의 거울이 되는 관계로 변해간다. 로빈슨이 섬에 부여한 질서는 방드르니의 인간본성에 바탕을 둔 행동에 의해 무너졌으며 로빈슨도 그것을 받아 들인다.
"그(방드르니)의 헌신적이 노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논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빈슨)는 처음으로 자기가 느끼는 예민한 구역질 등 그 모든 백인 특유의 신경반응이 과연 최종적이며 고귀한 문명의 보증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삶에 접어들기 위하여 언젠가는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죽은 지꺼기일지를 자문해 보았다."
"스페란차는 이제 기름진 땅으로 가꾸어야 할 황무지가 아니다. 방드르니는 이제 내가 교육시켜야 할 야만인이 아니다. (중략) 내가 그들을 처음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들이 지닌 마술적이라 할 만한 새로운 그 무엇에 의해서도 흐려지지 않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니의 관계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나'와 조르바의 관계와 유사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조르바의 질문 중,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요?',라는 대사가 나의 독서록에 남아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로빈슨과 방드르니는 서로를 좀 더 화학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 부분이 흥미롭다. 마침내 오랜 세월, 28여년이 지난 후 매끈한 상선 한 척이 스페란차에 도착하면서 로빈슨은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했다. 그는 섬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다. 하나님이신 태양 아래서 스페란차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속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어떤 완벽한 극한점에서 균형을 이루고있는 이 영원한 순간으로부터 몸을 빼내어 피폐와 먼지와 폐허의 세계속으로 추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는 철학적인 방향이 다르다고 저자는 이야기 하면서 '비인간적인 고독으로 인하여 한 인간의 존재와 삶이 마모되고 바탕에서부터 발가벗겨짐으로써 그가 지녔던 일체의 문명적 요소가 깎여가는 과정과 그 근원적 싹쓸이 위에서 창조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고 한다.
나는 이 소설을 타자(나 이외의 것)와 타인에 대한 이야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앞 부분은 자기 외에는 인간이 없는 섬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 이외의 어떤 것, 즉 거처를 만들고 가축을 길렀으며 식량을 비축하고 스스로 총독이되고 법을 만들었다. 뒷 부분에서는 방드르니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존재한다(Exister)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밖에 있다(sistere ex)는 뜻이다. 밖에 있는 것은 존재하고 안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나의 이미지, 나의 꿈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역시 나 자신으로부터 타인 쪽으로 도망쳐나감으로써만 존재한다."
소설의 끝 부분에서 로빈슨은 마침내 완벽하게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 영원한 현재의 삶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전혀 새로운 세계'는 나 이외의 것에서 나를 구하지 않고 나로 말미암은 나를 만들어가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그 길을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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