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초 후 버섯구름이 하늘로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게 서서 자신이 목격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으며 괴로워했다.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 바가바드기타의 문구를 떠올렸다. ‘나는 이제 죽음이 된다. 세상의 파괴자가 된다.’ 베인브리지는 이보다 좀 더 세속적인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이제 우린 다 #자식들이야.’”
1945년 7월 16일 이른 아침, 태양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지만, 몇 분 뒤 그보다 밝은 빛이 뉴멕시코 사막을 불태웠다. 그날은 10만 명이 넘는 과학자, 노동자, 군인이 투입된 핵폭탄의 폭파실험이 있었던 날이었다. ‘트리니티’라고 불렸던 프로젝트가 실행된 그해, 8월 6일에는 우라늄 폭탄이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플루토늄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엔리코 페르미 평전>은 누가 뭐래도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뉴멕시코 사막의 사건에 가장 책임이 큰 물리학자’였던 엔리코 페르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페르미의 삶을 이야기하기 전,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이 핵폭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양자개념(Quantum)을 도입한 이래, 1911년 어니스트 리더퍼드가 원자의 중심에 작은 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 핵과 핵을 둘러싼 입자연구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마침내 중성자의 속도를 늦춰 원자와 충돌시키면 핵을 분열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학자들은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켜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까지 찾아냈다.
양자역학이 학문적으로, 실험적으로 발전하던 그때, 인류는 하필 전쟁 중이었다. 양자역학을 창시했다는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와 핵분열 현상을 알아낸 ‘오토 한’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 남아있었다.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사명감으로 뭉친 군인과 학자가 모여 ‘맨하튼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핵폭탄은 개발되고 사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이 핵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가 되는 과정의 중심에 있던 학자 중 한 명이 엔리코 페르미였다. 190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페르미는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하면서 1922년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마에서 연구를 계속하던 페르미는 노벨상을 받던 1938년, 파시즘으로 물든 이탈리아를 떠났다. 그의 아내가 유대인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천재 물리학자는 운명적으로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페르미의 천재성을 증명해 주는 일화가 있다. 뉴멕시코 사막에서 세계 최초 핵실험을 시도한 날이었다. 핵폭발이 일어난 직후 페르미는 종이를 찢어 허공에 떨어뜨렸다. 몇 초 후 폭풍이 벙커를 강타하면서 종잇조각이 뒤로 밀렸다. 페르미는 보폭으로 거리를 측정한 후 폭발강도를 계산하였다고 한다. 로마에서 페르미가 연구팀을 이끌고 있을 때, 그의 별명은 절대 무오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일 파파(Il Papa)’, 즉 ‘물리학의 교황(The Pope of Physics)’이었다. 이 책의 부제(副題)다.
책에는 수첩에 메모를 하는 페르미의 사진이 있다. 그는 수많은 공책에 데이터를 기록했고 현상을 관찰하고 이해할 때는 메모에 크게 의존했다고 한다. ‘이 습관은 평생 유지되었고 사람들이 항상 기적처럼 여기던 페르미의 놀라운 기억력은 이 기록 습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는 동료학자인 ‘레오나 우즈’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페르미는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변화를 어떻게 예측해야 하는지, 세상이 주는 수모와 모욕을 어떻게 견디는 지, 그리고 무거운 부담감과 죽음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얼마 전 읽었던 <불멸의 원자>(사이언스북스)라는 책에서 이강영 교수가 엔리코 페르미를 극찬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이강영 교수는 페르미에게 빠진 이유를 ‘우아함’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우아함’이란, ‘어려운 일을 전혀 힘을 안 들이는 것처럼 쉽게 하면서도 세심하고 뛰어나게 해낸다는 말’이다. 나는 <불멸의 원자>를 읽고 53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엔리코 페르미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졌고 이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은 첩보영화나 모험소설처럼 읽힌다. 핵이 분열될 수 있다,는 실험의 성과를 누가 먼저 차지할 것인가, 아이디어를 누가 먼저 실험으로 증명하는가, 에 대한 학문적인 자존심 싸움이 볼만했다. 이와 함께 핵분열을 통제하면서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장면들은 이 책이 과학자의 평전이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이 책을 통해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오펜하이머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이득 중 하나다. 페르미와 하이젠베르크는 1세대 양자물리학자라고 할 수 있는 닐스 보어와는 스승이자 친구로서 학문적인 교류와 인간적인 친분을 쌓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서로 친구가 되지 못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내용 중, 독일이 ‘우라늄 클럽’을 만들어 핵폭탄 제조를 시도했던 한 부분은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적인 책 <부분과 전체>(서커스)의 내용과 달랐다. 두 권의 책을 비교해가면서 읽는 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리더인 오펜하이머와 페르미의 관계도 눈여겨 볼만하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사이언스북스)라는 책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그가 만든 무기가 ‘사실상 이미 패배한 적국’에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소련과의 경쟁적인 핵무기 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수소폭탄을 개발하려는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미국 공화당 정부는 그를 청문회에 세우고 비밀취급인가를 취소했다. 오펜하이머는 금수저 물리학자로, 리더로, 정치인으로 변신을 거듭했지만, 페르미는 언제나 페르미였다. 그는 오직 물리학자였다.
나는 이 부분에서 페르미에게 실망스러웠다. 1945년 8월 28일, 친구 아말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페르미는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시간이 ‘과학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였으며 ‘몇 개월 또는 몇 년간 지속될지도 몰랐던 전쟁을 일찍 끝내는데 기여하게 되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라고 썼다. 페르미는 차가운 이성과 논리에 뿌리를 두고, 숫자, 사실만 바라보는 물리학자였다. 내가 위대한 물리학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0세기 초반 위대한 물리학자들이 발전시킨 양자역학은 인류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저자는 ‘파울리의 원리, 양자역학, 페르미-디랙 통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반도체도, 트랜지스터도, 컴퓨터도, MRI도, 레이저도 그리고 우리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다른 발명품도 탄생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그들도 알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로 우리는 그들이 창조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1952년 로체스터 대학교 연설에서 페르미는 ‘과학 기술의 역사가 우리에게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기본이해에서 일어나는 과학적 진보가 곧 기술 및 산업응용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이 규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과학자는 아니지만, 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 원자의 구조에 대한 관심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김상욱의 양자공부>에서 김상욱 교수는 핵과 전자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고, 둘의 크기는 너무 작아서 원자는 빈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라고 한다. 도심에 농구공만한 크기의 핵이 있다면 10km정도 떨어진 외곽지역에 전자가 떠돌고 있다고 보면 된다.
책과 책상, 노트북, 나의 몸은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비어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채우려고 할 필요가 없다. 채워질 수도 없다. 다시 개별적인 원자로 돌아가기까지 행운을 즐기기만 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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