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나 외롭지 않다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
저녁 시간 내내 아내의 콧노래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낮에 혼자 <밀수>라는 영화를 보고 왔다고 한다. 아내는 '이 영화는 천만 갈 각'이라고 흥분했다. 특히 70, 80년대 유행한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적절하게 사용한 것을 칭찬했다. 알고 보니 가수 장기하가 음악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나는 토요일 오후 '영화의 전당'으로 향했다.
요즘 영화 관람료가 부쩍 올랐다. '영화의 전당'에 오기를 잘했다. 팔천 원이다. 핫도그와 콜라 한 잔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노트북을 꺼내어 '휴가지에서 읽기 좋은 책'을 주제로 인스타 게시용 사진 한 장을 뚝딱 만들어 게시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창문을 통해 들어온 KNN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영화를 기다렸다.
영화관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들어찬 것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코로나로 달라졌던 풍경을 다시 복원한 느낌이라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관객 한 명이 나의 무릎을 살짝 치고 지나가는 것도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사람이 그립긴 했나 보다.
'영화의 전당'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객석에 불이 꺼져있다는 것이다. 성격 급한 관객 몇 명이 어둠 속에서 자리를 뜨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그대로 앉았다. OST를 다시 한번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자막에 표시된 내용을 읽노라면 영화 제작의 이모저모를 잘 살필 수 있다. 영화는 감독과 주연, 조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스탭과 주변인의 도움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켰다. 관객으로서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방법은 자막이 올라갈 때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읽어 주는 것이다.
영화는 어땠어?
기대한 것 만큼 재미가 있었다. 스토리도 잘 짜였다.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렸다. 악당들을 깡끄리 쓸어버리고 주인공들은 고생 끝 벼락부자! 이렇게 비 현실적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든다.
연기는 김혜수(춘자 역)가 하드캐리했다. 김혜수는 해녀로, 밀수보따리 장사치로, 협잡꾼으로, 전략가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두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군천(밀수가 이뤄졌던 가상의 지역)'에서 일당이 일망타진되고 춘자만 아슬아슬하게 도망쳤다. 춘자는 서울에서 밀수보따리 장사를 하던 차에, '권 상사(조인성)' 무리에게 잡혔다. 권 상사에게 잡히면 최소 발목, 손목 하나는 잘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권 상사가 등장하기 전부터 김혜수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이윽고 마주한 다음, 빌기도 하고 나중에는 당차게 권 상사에게 막힌 밀수길을 터 주겠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김혜수의 연기 관록 그 자체를 보는 기분이었다.

두 번째 장면은 춘자가 해녀복장을 하고 배에서 여유롭게 바닷바람을 즐기는 모습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호미와 칼을 가는 쇠를 잡았다. 시선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향하고 있다. 검은 고무신을 신고 양 발을 쩍 벌리고 생각에 잠긴 듯하다. 아름다운 스틸 컷이다.

장기하의 음악도 영화를 빛나게 하였다. 원래의 감성을 잘 살린 적당한 편집이 장인답다. 당시의 의상과 배경을 어찌 그리 잘 골랐을까? 잠시 70년대, 나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그래서였을까? 영화관에는 유독 50대가 많이 보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가수 박경희), <연안부두>(김트리오), <밤차>(이은하), <님아>(펄시스터즈) 등이다.
청량함과 시원함을 안겨 준 장면
물 속 촬영이 많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 내용이 물속에 빠뜨려 놓은 밀수품을 해녀가 건져 올려서 되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닷속 청량함과 뱃전에 철석이는 파도의 시원함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폭염 속 영화관을 찾은 관객에게 안성맞춤이다.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 춘자와 진숙(염정아)이 서로 교대하는 장면이다. 한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가고 한 사람은 나오는 장면에서 둘이 손을 맞잡고 당긴다. 운동역학적으로 계산해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떠 빠르게 물속으로, 물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밀수>에서 춘자와 진숙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누군가의 밀고 때문에 밀수현장이 세관에 발각되고 나서였다. 이때의 사고로 진숙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사망했다. 춘자는 도망가고 진숙은 잡혀서 옥살이를 했다. 진숙은 밀고자가 춘자라고 확신하고 그녀에 대한 증오를 쌓아왔다. 진숙은 둘이 다시 만나 새로운 밀수를 도모할 때에도 처음에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밀수에 가담한 모든 인물이 거짓 표정과 말로 서로 속였다. 나중에서야 진숙은 춘자의 진심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험악한 밀수꾼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펼친다.
영화 <밀수>에서 류승완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물길이 돈길이다. 70년대 급속한 산업화 속 팽개쳐진 사람들의 모습, 욕망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질주할 때의 결과.
나의 머릿속에는 춘자와 진숙이 교대하면서 손을 맞잡고 당기는 장면이다. 나는 류승완 감독이 두 여인의 믿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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