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비츠는 어느 작가보다도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거의 완벽하게 전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자기가 살았던 한 시대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이 그 시대를 넘어 지금에까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작가가 특수한 현실 내지 대상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70쪽)
1876년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진보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난 케테 콜비츠는 산업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노동과 삶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판화로 그려낸 예술가이다.
그녀의 연작인 <노동자들의 귀가>와 <농민전쟁>은 공통점이 있다. <궁핍>한 삶을 견뎌내는 <밭가는 사람들>, <철도역 노동자들의 귀가>와 <짓밟힌 사람들>의 모습에 이어 <무기를 들고>, <직조공들의 행진>과 <봉기>, <폭발>, <폭동>으로 치닫지만 <결말>은 패배로 끝나고 <죄수들>이 되거나, 노동자와 농민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이런 주제에는 흑백톤이 어울린다. 그녀가 판화를 그리는 이유다.
<여인을 무릅에 안고 있는 죽음>, <죽음이 덤벼들다>, <친구로서의 죽음>, <죽음의 부름>, <마지막>, 모두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책의 부제인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은 초췌한 젊은 엄마가 두 아이를 치마폭에 감싼채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는 그림이다. 그림속의 여인은 콜비츠를 닮았다. 또한, 그녀는 50여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케테 콜비츠는 왜 죽음과 초상화 그리기에 집착하였을까? 일터를 빼앗긴 자, 자비심을 호소할 곳이 없는 자, 폭력(전쟁)으로 짓 밟힌 자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죽음이다. 그녀는 죽음을 그렸지만 죽음 전의 상황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상상해 본다. 자신은 예술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이마에 손을 얹은 자화상>, <테이블 앞의 자화상>), 하고 엄숙하게 자문하지 않았을까. 나는 자신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낸 작가를 좋아한다.
이 책에서 본 그림들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동판, 1903)이다. 기회가 된다면 인터넷으로 본 그림들을 쾰른과 베를린의 '케테 콜비츠 박물관'에서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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