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知

농무_낙타_신경림_200116

필85 2020. 1. 16. 22:06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중략)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농무> 일부)

1975년 3월에 초판 발행된 시집 <농무>에는 시인 신경림의 방황과 세상을 향한 반항이 담겼다.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 / 올 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겨울밤> 중)
'오늘 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라도 부르자'(<원격지> 중)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 눈 오는 밤에 나는 / 잠이 오지 않는다'(<산읍일지> 중)

세상을 돌고 돌아 3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출판된 <낙타>에서 독자는 전혀 다른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농무>에서 시인은 공사판과 광산을 떠돌고 학원강사로, 건달로서의 삶의 모습을 그렸다면 <낙타>에서는 이스탄불과 안나푸르나, 콜롬비아, 샌프란시스코, 보르도에서의 시인의 생각을 보여준다. 시인은 '세계화는 나를 가난하게 만들고, 세계화는 나를 왜소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인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는 일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그 느림속에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다고 한다.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 밖에 없는 시'라는 장르는 겨울에 어울린다. 나는 겨울이 되면 시가 끌린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와 군더더기를 모두 발라내고 생명만을 간직한 시는 닮았다. 시 한 편이 책 한 권이고 한 생生이다.

'광부의 아내가 되었을 게다'로 시작하는 <그녀의 삶>이라는 시, '무언가 조금은 슬픈 생각에 잠겨서 / 또 조금은 즐거운 생각에 잠겨서 / 조금은 지쳐서 이 세상에서 처럼'으로 끝나는 <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라는 제목의 시, 이런 시를 읽고 있으면 내가 가지 못한, 갈 수 없는 하나의 삶이 내몸을 꿰뚫고 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백석의 시를 읽을 때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놓치고 갈 수 없듯이, 신경림 시인을 만나면서 <농무>와 <낙타>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목계장터>를 소리내어 읽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를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찬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