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보름 정도 남겨두고 시집 두 권을 잡았다.
<해자네 점집>은 몇 년 전 읽었던 김해자 시인의 시평집 <시의 눈, 벌레의 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시평집은 시인의 눈으로 또 땅 표면에 사는 벌레의 눈으로 세상을 좀 더 따듯한 시각으로 보려고 했다면 이 시집은 세상 밑 바닥 그 자체를 노래한다.
<머리 맡에 막걸리 두 병 놓여 있었다>, <어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벽 너머 남자>, <칼 든 남자 바늘 든 여자>, '눈물을 다 말리기엔 정의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말하는 <염무웅 선생의 눈물>, 삼례 나라슈퍼 삼인조 강도의 사연을 다룬 <모른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을 다룬 시, 그 모든 시는 한 편 한 편이 우리가 돌아보지 못하거나 돌보지 못한 이웃의 이야기들이다.
시인은 <시의 눈, 벌레의 눈>에서 '시란, 땅속에 숨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며, 제 생명을 존속하는 동시에 땅을 일구는 미물의 눈이며, 그 눈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 혼돈의 시대에 글을 쓰고 읽는 자가 마땅히 해야할 응답'이라고 했다.
<해자네 점집>을 읽다보면 김해자 시인은 세상을 일구는 미물의 눈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인은 자본과 탐욕으로 덮힌 세상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재를 시의 형태로 들려준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응답이 필요하다.
또 다른 시집, 손세실리아의 <꿈결에 시를 베다>에는 미소와 감동을 주는 해학과 추위를 녹일만한 따듯함, 그리고 고마움이 가득하다.
<나를 울린 마라토너>라는 제목의 시에서, 어머니는 '이 풍진 세상에 / 여자의 몸으로 와 / 여자를 낳은 일이야말로 /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이라고'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딸을 또 만나고 싶다고 하자, 딸은 '이십여 년 전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 있는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이런 몸으로 재출전은 무리라 너스레'를 떤다.
나를 울컥하게 만든 시는 <사재기 전모>라는 시다. 한 동네 사는 글쟁이 모임에서 화장품 방문판매원 아들인 막내 시인이 자신도 사재기 조작과 무관하지 않다고 고백한다.
"시집 출간 직후 어깨 탈골로 접골원 찾는 일이 빈번하기에 짚이는 데가 있어 가방을 뒤졌더니만 화장품 반 시집이 반 이더란다. 먹지도 입지도 못할 종이때기를 누가 사나 싶은 노파심에, 이문 한 푼 안남는 책 장사를 자청해 무려 일흔일곱 권이나 팔았단다.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도 나오지 않더라는
호랑이 어금니 같은 시집을 다시펼친다
울컥, 가을이 깊다" (<사재기 전모> 일부)
'무려 일흔일곱 권'이라는 대목에서, '억장이 무너졌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시인은 '시에 진 빚이 많다'고 하면서 '사는 일이 매양 이러하다. 어눌하고 촌스럽고 거절에 서툴러 궂은 일을 자초하기도 한다. 오지랖이 넓어 아프고 고달프고 사무치고 아련하다. 시가 나를 향해 제발로 찾아와 준 건 어쩌면 이런 못난 구석이 눈에 밟혀서 일게다. 혼자 나눌 수 없게 위태로워 손 내밀어 준 것일게다. 한 일에 비하면 황홀한 포상'이라고 <시인의 말>에서 밝힌다.
김해자 시인은 세상의 밑 바닥에서 문제와 답을 찾으려고 했으며 손세실리아 시인은 알아서 제발로 찾아오는 시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연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짧은 글을 즐기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시 한 편이 소설 한 권이고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겼다. 생각이 무거워졌다.
나도 시에게 진 빚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인들에게 진 빚일 것이다. 잊고 지냈던 단어와 문장으로 만든, 짧지만 긴 이야기는 잃고 있었던 느낌과 기분을 깨워준다. 시를 읽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알게 모르게 때로는 폭우를 만난 듯 강렬하게 나를 떨게 한다. 하루에 책 한 권을 읽지는 못해도 시 한 편은 챙겨보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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