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이 장학 사업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억울함을 후배들이 밟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약상에서 머슴살이하며 일을 배웠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병든 사람들의 돈을 받아 잘 먹고, 잘 입고 다니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김주완 기자는 김장하 선생이 지원한 장학생 수는 천 명 이상이고 금액 또한 40억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학교나 장학재단을 통해서 지원한 것 말고도 많은 학생들에게 현금을 지급했습니다. 선생을 찾아온 학생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성적 증명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가난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선생님, 공부는 하고 싶은데 집에 돈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생활비까지 포함한 학비를 현금으로 주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40대에 설립한 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그 당시(1991년) 땅과 건물 시세만 100억 원대에 달했습니다. 2021년에는 자신이 설립한 문화재단을 해산하고 잔여재산을 몽땅 경상국립대에 기증했습니다. 진주의 언론인, 예술인, 환경운동가, 시민단체 회원들은 금전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김장하 선생을 찾았습니다. 2002년에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보호시설도 선생의 도움으로 개관했습니다.
선생은 한약업으로 벌어들인 돈 전부를 사회에 되돌려주었습니다. 선생의 선행은 팔십 세를 앞두고 있을 때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1944년생입니다. 사십 년 넘게 이어온 선행이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선생이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하지 않았습니다.
<줬으면 그만이지>의 저자 김주완은 경남도민일보에서 오랜 기자 생활을 하고 명예퇴직하였습니다. 저자와 김장하 선생의 인연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자는 전교조 사태 때 단 한 명의 해직 교사도 없었다고 알려진 사학 고등학교의 이사장이 학교를 국가에 내놓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장하 이사장을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억의 재산가이면서도 승용차 없이 한약방으로 걸어서 출퇴근하는 모습,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을 펼치는 것을 보고 저자는 감동하였습니다. 인터뷰는 무산되었지만, 그때부터 김장하 선생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았습니다.
저자는 퇴직 후 인물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김주완 작가는 ‘좋은 분들을 널리 알리는 것 또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데 유용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고 ‘김장하’라는 인물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라는 부제가 붙은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이 그 성과물입니다. 물론 선생으로부터 인터뷰나 취재 허락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 내쫓지는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막무가내로 한약방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신 것부터 취재는 시작되었습니다. 때마침 ‘MBC경남’에서 김장하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요청이 와서 흔쾌히 함께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저자는 주변 사람을 만나고, 선생이 잠시라도 등장한 영상과 사진, 옛 기록을 더듬었습니다. 김주완 작가는 취재하는 동안 ‘얽힌 인연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연결되는 기쁨의 연속이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버렸으면 미련 없이 버려야지. 줬으면 그만이지. 감사패 그거 뭐 하려고...”
문화재단을 해산하고 남은 재산을 몽땅 대학교에 기증하고 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감사패 전달식과 명예의 전당 제막식을 하겠다고 선생을 초청한 것입니다. 선생은 못마땅했습니다. 줬으면 그만인데 뭐 하러 생색을 내는 행사를 하냐는 불만입니다. 저는 ‘줬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책 제목을 잘 지었습니다.
제게 더 와닿는 말이 있었습니다. 약방 폐업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장학생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온 젊은이는 선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제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되어 죄송합니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저는 선생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선생이 한사코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선생의 조건 없는 장학 사업이 세상에 알려지면 판사, 대학교수, 기업 대표가 된 저명인사들이 조명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주목받지 못하지만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평범한 일반인의 세상입니다. 선생의 진심이 와 닿았습니다.
저는 요즘 ‘좋은 어른’은 어떤 어른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아는 분으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를 읽고 제가 내린 결론은 좋은 어른은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김장하 선생도 책을 가까이했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서 ‘남명학’에 심취했고 남명학연구회 후원회장을 지냈으며 대학교에 ‘남명학관’을 건립했습니다. 선생은 90년대에 이메일을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천리안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글을 썼습니다. ‘형평운동’과 ‘여성운동’에 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라는 기치를 내건 ‘형평운동’ 기념 사업회 회장을 지냈고 ‘호주제 폐지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선생은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지만, 이제는 좀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본 김장하 선생이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의 발걸음이 우리 사회에 펴져 나가면 좋겠습니다. 이웃에게 따뜻한 눈길 건네며 손잡아주는 사회로 사부작사부작 다가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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