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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_산복빨래방

필85 2024. 5. 19. 21:44

산허리를 지나는 도로 산복도로’, 부산에는 장장 22킬로미터에 이르는 산복도로가 있습니다. 산복도로를 따라 위, 아래로 다시 끝없는 계단이 또르르 깔렸습니다. 계단 중간쯤 오르다 보면, 마주 오는 사람의 어깨를 피하며 걸어야 할 정도로 비좁은 골목이 나타납니다. 골목 따라 따닥따닥 붙어있는 집 대문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 아랫집 옥상입니다. 산복도로 집마다 아직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부산의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오랜 세월 산허리에서 꿋꿋이 자신의 삶을 지켜온 주민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언론사 기자와 피디 4명이 일을 꾸몄습니다. 회삿돈으로 산복도로 빈집을 빌려 빨래방을 차렸습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무료로 옷과 이불을 빨아주고 세탁비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개월 간 주민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고 영상은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산복빨래방>이라는 책도 출간했습니다.

 

오늘의 부산과 대한민국을 만든 산업화 시대, 그 속에는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이라 생각하고 버텨낸 여공들의 삶이 있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이들의 피땀은 사라지지 않고 산복도로 어귀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리가 산복도로에서 만나고 싶었던 살아있는 이야기의 한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저는 산복도로에서 만난 이야기의 조각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먼저 신발공장 이야기입니다. 피난민이 휩쓸고 간 부산에 가장 활발한 산업은 신발공장이었습니다. 접착제 냄새가 진동했지만, 기술이 없는 여성 노동자가 현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가 젊음을 갈아 넣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다 이야기입니다. 산복도로 새댁은 바다로 떠난 사내의 안녕에 마음을 졸이면서 자식과 시댁 식구까지 먹여 살렸습니다. 하루에도 대여섯 개의 도시락을 싸야 했습니다. 물을 구할 수 없어 새벽이면 물동이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산복도로를 방문한 관광객에게 부산의 바다는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주민들에게는 삶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족 이야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산 아래서 또 다른 가족을 이루고 사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묻어있습니다. 자신들이 잘 나서 평지에 사는 줄 아는 자녀들에 대해 섭섭함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산복도로의 삶과 사랑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빨래방 팀이 세탁기와 건조기만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 놓였던 고양이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고양이 사연을 담은 영상의 조회 수가 대박이 나는 바람에 산복빨래방이 덩달아 알려졌습니다. 찢어진 흑백사진을 교정해 준 일을 계기로 일일 사진관도 열었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영화도 관람했습니다.

 

  책에서는 부산시에서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산복도로 르네상스사업도 언급했습니다. 지금은 덩그러니 건물만 남게 된 이유는 주민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시재생 전문가,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라는 책에서, 도시계획 전문가 또는 정책 결정자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있을 뿐 도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관심이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제인 제이콥스에 따르면 활력 넘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네 가지, 복합적인 토지이용, 작은 블록, 오래된 건물의 존재, 적당히 높은 개발밀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산복빨래방 팀이 사라지는 작은 블록에 주목하고 산복도로 골목에 빨래방을 차렸습니다. 도시재생에서 소외된 주민을 찾아서 빨래방에 카메라를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들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 ‘부산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지역의 가치, 부산만의 콘텐츠는 무엇일까? <산복빨래방>에서는 신발공장과 바다,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가치 있는 것을 발굴하여 동시대 시민과 공유하며 정신적 자산으로 만드는 일, 이런 과정을 통해 지역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 일, 한 발 더 나가서 행복한 지역사회의 미래를 그리는 일, 산복빨래방 팀이 해냈습니다. 저도 부산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이 한 숟가락 더해졌습니다.

 

덧붙이는 말, <산복빨래방>2024원북원 부산도서로 선정된 것을 축하합니다.

 

 

 

https://youtu.be/-eUeJ9IFSmE?si=MKaU95vZENUrIIt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