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동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서구 열강들의 군사적, 경제적인 침략에 맞서 자립적 근대화에 성공한 근대 일본의 역사를 유신과 건국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쓴 것이다."
<조용한 혁명>의 첫 문장입니다. 일본 근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건국' 과정을 '조용한 혁명'으로 표현했습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혁명으로 정치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천황 중심으로 단일화되었습니다. 쇼군(將軍)을 중심으로 한 봉건 체제, 지역 할거주의, 차별적 신분제도의 틀을 깨뜨렸습니다.
국내 정치 변화는 외교적인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1858년 일본이 미국과 불평등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1889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일본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얻은 자신감으로, 1911년 관세자주권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반세기 동안 일본에서 조용하지만 거대한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800페이지 달하는 <조용한 혁명>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일본 근대사는 이제까지 제가 알던 일본 역사와는 달랐습니다. 저자는 여행안내자처럼 저를 이끌었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눈앞에 펼쳐주었으며 시대를 바꾼 인물들을 직접 만나게 했습니다.
이와 함께, 평소에 제가 가지지 못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줬습니다. 저자가 일본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달랐습니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 역사를 중심으로 두고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일본 근대사에 관한 우리의 이해 수준은, 심하게 말하자면 이직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 수준을 못 넘어서고 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저자가 알려준 길을 따라 메이지 유신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습니다. 저자는 제1부 ‘유신과 건국의 기원’에서 황제와 전국의 다이묘들이 직접 서명한 문서, ‘5개 조 서약문’에 담긴 정신, 즉 정통성, 근대성, 공공성을 이야기합니다. 제2부에서는 유신 혁명을, 제3부에서는 건국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들려줍니다.
제가 정리한 메이지 유신의 성공 요인은 세 가지입니다. 학문의 발전, 이와쿠라 사절단 견학, 하급 사무라이의 등장입니다.
첫 번째, 학문의 발전 부문입니다. 저는 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 이전에 교육이 있었고 시대정신을 일군 학자가 있었습니다. 주자학의 새로운 해석을 가져온 세 명의 학자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토 진사이’는 일반 백성을 공적 영역의 주체로 인정하는 사상을 내놓았으며, 황통의 연속성과 일본의 우수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이라는 학문에서 정치학을 독립시켰습니다. 저자는 오규 소라이를 마키아벨리에게 견주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학자는 ‘요시다 쇼인’입니다. 그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원조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명분인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 사상가이면서 행동가입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두 번째, 혁명을 성공적으로 만든 요인은 ‘이와쿠라 사절단’입니다. ‘이와쿠라 도모미’를 대표로 한 사절단은 1871년 요코하마 항을 출발하여 1년 10개월 동안 12개 국가를 순방하였습니다.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 국제정치 질서와 상황을 학습하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일본을 바꾸는 지침이 되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미국의 철도와 영국의 공장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일본에 적용하였습니다. 일본의 경제력이 급상승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실상을 보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일본 함대는 1904년 2월 과감하게 뤼순함대를 선제공격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 이야기는 CCTV에서 출판한 <대국 굴기, 강대국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읽었지만, 메이지 유신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이 가진 디테일에 놀랐습니다. 에도시대에는 외국 배가 입항할 때 반드시 해외 풍설, 즉 정보를 수집한 보고서를 작성해 나가사키 행정당국에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정보를 획득하고 지식을 쌓아가는 노력이 지금의 일본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은 하급 사무라이의 등장과 활약입니다. 메이지유신 3걸이라고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의 리더십이 새로운 일본을 일으켜 세웠다고 하지만, 사무라이 계급 무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봉건적 사무라이의 정신적 각성이 있었기 때문에 혁명은 가능했습니다.
하급 사무라이 집단을 국가를 쇄신하는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키운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막번체제를 타파하고 천황제 통일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새로운 정신을 깨우쳐준 학자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식, 애국심, 공적 사명감을 체득한 사무라이가 시대의 중심으로 우뚝 섰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메이지 유신의 성공 요인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배움’입니다. 세 명의 학자들이 배움의 내용을 정립했으며 이는 시대정신으로 펴져 나갔습니다. 지도자들은 대규모로 선진문물을 시찰하여 배운 것을 일본 사회에 적용했습니다. ‘앎’으로부터 정신적 각성으로 이어진 사무라이들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중국 철학자 ‘이천’이 말한 '앎이 깊으면 반드시 행동이 따르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일본의 민족성을 이야기할 때면 언급되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입니다. 저는 이 책을 세 번 읽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알 수 없는 일본인의 민족성을 잘 표현한 책 제목입니다. 일본인은 ‘각자 알맞은 위치를 갖는 것’, 즉 질서와 계층제도에 목숨을 거는 민족입니다.
커다란 명분이 서고 순서와 위치가 정해지면 의무와 의리를 지킵니다. 수치와 모욕을 받게 되면 ‘깃털처럼 가벼운’ 목숨은 망설임 없이 잘려 나갑니다. 최근에 디즈니플러스에서 방영된 드라마 <쇼군>에서 봤던 수많은 할복 장면에 생생합니다.
일본을 통째로 바꾼 메이지 유신은 군인과 평민의 희생을 불러들이는 국내 전쟁보다는 대화와 협상, 암살과 자결로 ‘조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요란하지 않게 혁명이 완벽하게 진행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화와 칼’로 대변되는 민족성과 질서와 위치를 중요시하는 집단성 때문으로 파악됩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건국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저자의 방대한 자료 조사와 현장 답사, 명쾌한 설명과 통찰력 덕분입니다.
https://youtu.be/q2xdZSfbwLA?si=wcsnB3PycxlK5f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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