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知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언어에 대해 내 안의 시적자아가 감흥한 기록

필85 2022. 9. 12. 22:11

https://youtu.be/zKZZzmRCRrk

 

시인이 쓴 산문집을 읽는 느낌은 가을 들녘을 산책하는 듯 여유와 평화가 넘칩니다.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소재라도 시인의 손을 거치면 달라집니다. 시인이 사용하는 문장과 단어는 비단처럼 매끄럽지만, 그 속에 힘이 있어서 독자에게 용기를 샘솟게 하고 때로는 위로를 전합니다.

 

최근에 읽은 책을 소개하자면, 손세실리아 시인의 <그대라는 문장>(삶창), 김해자 시인의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아비요), 김소연 시인의 <나를 뺀 세상의 전부>(마음의숲)라는 책입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에 읽을 만한 책입니다.

 

  <예술의 주름들>에서 나희덕 시인이 소개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감동을 준 작품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 언어에 대해 내 안의 시적 자아가 감흥한 기록이라고 이 책을 소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발견하게 해준 스승이라고 합니다. 시인이 소개한 서른 명의 예술가와 작품 중 셋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작품입니다. 나희덕 시인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퍼포먼스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다큐멘터리 <연인들, 만리장성 걷기>를 소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아브라모비치와 그녀의 연인이자 동료인 올라이가 만리장성 양 끝에서 걷기 시작해서 중간에서 만나는 여정을 담았습니다. 3월에서 6월까지, 한 사람은 서해에서 한 사람은 고비사막에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중간 지점에서 만났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습니다. 예술적이고 시적인 삶입니다.

 

시인은 이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면서 걷는 것을 바느질에 비유한 <걷기의 인문학>(리베카 솔닛 저)이라는 책을 언급하였습니다. 리베카 솔닛은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라면 걸어가는 길은 실이 되고, 걷는 일은 대지를 꿰매는 바느질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이 말을 인용하면서 시인은 걷는다는 것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의 행위인 셈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저는 걷는다라는 것을 치유의 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누군가를 환대하기 위해, 관계의 매듭을 풀기 위해 우리는 걷습니다.

 

두 번째는 황윤 감독의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영상을 소개하면서 시인이 제시한 길의 윤리학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야생동물의 로드킬(동물이 도로를 건너다 인간의 교통수단에 치여 죽은 일) 현장을 고발한 영상을 보고 시인은이 대지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원래 그들의 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지난 여름휴가 중, 제 차의 내비게이션은 국도에서 연신 진땀을 흘렸습니다. 제가 게을러서 업데이트를 제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 새로 뚫린 도로, 넓혀진 차선, 사라진 주택, 얼마나 많은 생명이 더 쫓겨나고 사라져야 우리는 멈출까요?

 

마지막으로 소개할 예술가는 정영창 화가입니다. 화가는 전쟁과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주로 그려왔다고 합니다. 그는 화폭 전체를 오로지 한 인물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초상화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서 초상화가 좋아졌습니다. 한때는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그리기를 배운 적도 있었습니다.

 

시인은 몸은 삶과 죽음이 싸우는 전쟁터이자, 욕망과 초월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하는 도량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초상화에는 그의 몸이 환경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한 세계를 그리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서야 저는 제가 왜 초상화에 끌렸는지 이유를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파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잘살고 있는지 제 얼굴을 한 번씩 살펴봅니다. 몇 장의 사진을 찍어도 마음에 드는 표정이 나오지 않을 때는 제 마음이나 정신상태가 불순할 때입니다. 남들 보기에 어떻든 제 모습이 사랑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제 표정이 모여서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시인이 소개한 예술가 중 케테 콜비츠, 자코메티, 글렌 굴드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재원), <작업실의 자코메티>(을유문화사), <글렌 굴드,피아노 솔로>(동문선)라는 책입니다. 이 중 케테 콜비츠에 관한 책을 소개합니다.

 

케테 콜비츠는 1876년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의 진보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작가는 산업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노동과 삶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판화로 그려낸 예술가입니다. 저는 책에 등장하는 그림, 즉 일터를 빼앗긴 자, 자비심을 호소할 곳이 없는 자, 폭력과 전쟁으로 짓밟힌 자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죽음 앞에 선 모습들을 보고 멍하니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케테 콜비츠의 생각과 그림에 빠져들게 하는 책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책에서 본 작품들을 쾰른과 베를린의 '케테 콜비츠 박물관'에서 마주하고 싶습니다.

 

  시인은 예술이란 얼마나 많은 주름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책 머리에서 말을 꺼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 <주름들>에서 주름은 골짜기처럼 깊어 / 펼쳐 들면 한 생애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라고 노래합니다. 저는 저의 주름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다만 욕망과 회한의 주름이 아니라 지혜와 여유로움의 주름을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2022.9.11.